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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 속에서' 14.06.14 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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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부활시기가 끝나고 더 긴 연중시기로 들어왔습니다. 연중시기는 편의상 연중시기(1)과 연중시기(2)로 구분됩니다. 주님 세례 축일 다음 날인 연중 제1주간 월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전까지(1)와 성령강림대축일 다음 월요일부터 대림 제1주일 직전까지(2)가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아주 긴 연중시기(2)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는 한 해의 흐름을 통하여 지정된 날들에 하느님이신 자기 신랑의 구원 활동을 거룩한 기억으로 경축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여긴다...이렇게 구속의 신비들을 기억하며, 자기 주님의 풍요로운 힘과 공로가 모든 시기에 어떻게든 현존하도록 그 보고(寶庫)를 신자들에게 열어, 신자들이 거기에 다가가 구원의 은총으로 충만해지도록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 102항

 공의회 교부들의 말씀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성경의 전통에 따라 하느님을 신부인 우리의 ‘신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랑에 대한 거룩한 기억’, 이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애틋한 말인지요. 이 기억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마르 2, 19) 이라는 복음 말씀처럼 ‘신랑의 현존(現存)에 대한 기억’입니다.

 따라서 한 해의 전례력은 ‘신랑의 현존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차 있는 보물창고(寶庫)입니다. 우리는 이 보물창고를 열어 우리와 함께 계신 사랑하는 내 님이신 신랑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전례력의 각 시기는 신랑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마련된 보물창고의 다른 방(房)들입니다.

 연중시기의 방 색깔은 ‘녹색’입니다. 녹색은 다른 색에 비해 나서기를 꺼려하고 멀리 있는 느낌을 주며, 희망과 겸손, 인내와 차분함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일상의 빛깔입니다. 담백하면서도 고요하고 그러면서도 고여 있지 않고 새로움을 궁리하게 만듭니다. 이런 녹색의 빛깔을 가진 방에서 녹색을 살고 싶어서 저는 이성선의 시 한편(티베트의 어느 스님을 생각하며)을 적어 책상 앞에 붙여놓게 됩니다. 녹색의 방이 더 환한 녹색으로 빛나는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의 방도 그리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산다는 것은
새처럼 가난하고
나비처럼 신성할 것

잎 떨어진 나무에 귀를 대는 조각달처럼
사랑으로 침묵할 것
그렇게 서로를 들을 것.
  

  언젠가 한겨레 신문에 연재된 <안도현의 발견>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썰물 때 형체를 드러냈다가 밀물 때면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여’라 한다고 합니다. ‘여’, 꽤 낯선 말입니다. 저는 처음 듣는 말입니다. 신문에 소개된 나희덕의 시 ‘여, 라는 말’을 읽어보니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다.

잊혀진 것들은 모두 여가 되었다/ 망각의 물결 속으로 잠겼다가
스르르 다시 드러나는 바위, 사람들은/ 그것을 섬이라고 부를 수 없어 여라 불렀다
울여, 새여, 대천어멈여, 시린여, 검은여.....
이 이름들에는 여를 오래 휘돌며 지나간/ 파도의 울음 같은 게 스며있다
영영 물에 잠겨버렸을지도 모를 기억을/ 햇빛에 널어 말리는 동안
사람들은 그 얼굴에 이름을 붙여주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사라져버리는 여도 있다
썰물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그 바위를 향해서도 여,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여가 드러난 것은/ 썰물 때가 되어서만은 아니다
며칠 전부터 날개를 퍼덕이던 새들 때문이다
그 젖은 날개에서도 여, 라는 소리가 들렸다.

  여는 ‘여기’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부끼리 서로를 부르는 말인 ‘여보’는 ‘여기를 보세요’ 라는 뜻이라 합니다. ‘여’, ‘여기’, 이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시인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기억과 망각 사이에, 실체와 허상 사이에 육지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여’가 있다고 말한다”.

 이 ‘여’를 통해 일상과 연중시기를 생각해 봅니다.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고, 보였다가도 보이지 않고, 좋았다가도 좋지 않고, 의미가 있다가도 무의미해지기도 하고, 알겠다가도 모르겠고, 사랑스럽다가도 미워지고, 복음이 보였다가도 감추어지고... 이를 삶의 ‘변덕’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삶의 ‘신비’가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여’와 ‘여기’는 그 사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상을 산다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모름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의 말처럼 다만 그 모름 속에서 먹고, 자고, 걷고, 웃는 것입니다. 그 모름 속에서 거대한 모름의 한 모서리를 쓰다듬으며 모름을 견디고 있을 따름입니다. 연중시기의 녹색 안에 인내와 차분함이라는 상징이 들어있는 이유가 이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 인내와 차분함 안에는 또 이런 의미의 ‘엄격함’이 들어 있습니다. “키 크고 목 긴 새들이 한쪽 다리로 서서 부리를 죽지 밑에 틀어넣고 한나절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새들의 자태는 혼자서 세상을 감당하는 자의 엄격함 이었습니다” (소설가 김 훈의 2004년 이상문학상 수상 소감) 그렇게 일상의 신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긴 연중시기 제2부를 시작하며 ‘지금-여기’와 ‘저기-너머’사이를 간절히 잇고자 하는 열망으로 ‘여기’를 살아가는 담백함의 은총을 청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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