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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부활이 왔습니다 14.04.19 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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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고 은 시인의 사치(奢侈) 라는 시의 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안도현의 이야기입니다. “스무 살 무렵, 고은 시집을 공부 삼아 읽다가 그만 뿅 가버렸다. 이 도저한 역설의 매혹을 나 혼자 감당할 수 없었다.”

  또 정희성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요. 그러나 이런 비문(非文)이 기막히게 명문이 되는 지점에 고은의 문학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이는 또 이렇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때로 세상의 논리를 무력화시키는 절대적 아름다움이 있는 거 맞아. 그 비논리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주려고 시인이 있는 걸 거야“

  저는 문학적으로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라는 이 구절이 어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도저한 역설의 매혹’이나, ‘이런 비문(非文)이 기막히게 명문이 되는 지점’이나, ‘세상의 논리를 무력화시키는 절대적 아름다움, 그 비논리적인 아름다움’이라는 느낌들은 공감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 그 분과 복음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 분의 부활을 또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부활은 분명히 ‘도저한 역설(逆說)’이나, 말이 되지 않는 ‘비문(非文)’이나, ‘비논리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또 엄연한 실재(reality)로서 ‘매혹’이고, ‘명문’이고, ‘절대적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라는 구절을 ‘당신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부활이 왔습니다.’ 라고 해 보고 싶었습니다.

  예전 여수의 한 본당에 있을 때 당시 순천 효천고의 한 선생님께서 교사일기 형식으로 인터넷에 연재하시던 내용을 중고등부 친구들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아픈만큼?"
"성숙해집니다."
"왜 그래요? 왜 아프면 성숙해져요?"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개운해지지요. 그것을 카타르시스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자기정화라고 하지요.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문학이 그런 자기정화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소화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면 슬픔이 와도 많이 불행하지는 않겠지요."

  ‘슬픔을 소화할 수 있는 영혼’이라는 말 앞에서 알듯 모를 듯 하지만 그래도 촉촉해지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말입니다. 아마도 어린 친구들이지만 각자 가지고 있던 슬픔이나 아픔을 이겨내고 소화해내고 싶은 바램들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왜냐면 저도 그러했으니까 말입니다.

  저에게는 누님이 없습니다. 위로 형님이 계시고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님’하면 괜히 좋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형님은 일찍 집을 떠나 직장생활을 하셨고 그 다음인 제가 동생들을 돌보며 살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따뜻한 누님이 계셨으면 좋겠다는 속마음이 있었고, 또 고생하시는 어머니에게 큰 딸 같은 누님이 계셨으면 이야기 상대도 되고 어머니가 덜 힘드실 텐데 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누님’은 저에게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고, 마음속의 ‘누님’에게 제 힘듦과 바램을 투사하기도 했습니다. 그 투사 안에서 누님하면 저에게는 괜히 ‘슬픔을 이겨낸 한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저에게 ‘슬픔을 소화한 사람, 누님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옵니다.  

  ‘슬픔을 소화할 수 있는 영혼’, 참 아름답습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소화할 수 있는 영혼은, 또 죽음을 소화할 수 있는 영혼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감히 그 분을 누님으로, 형님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광영가족 여러분을 누님과 형님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광영가족 누님과 형님들인 당신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부활이 왔습니다.’ 라는 인사와 함께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이번 사순절을 지내며 마음에 많이 와 닿았던 유다교 하시디즘의 ‘슬픔의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작은 선물로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커다란 슬픔의 나무 밑으로 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겪은 고통과 불행을 슬픔의 나무 가지에 걸어놓게 됩니다. 러고는 천천히 나무 주위를 돌면서 자신이 나뭇가지에 걸어둔 것보다 덜 고통스러워 보이는 인생이 있으면 그것을 자신의 것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결국에는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택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때는 감당하기 힘들었고 어려웠어도 결국 자신이 겪은 고통과 아픔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는 가볍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에 도착했을 때보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슬픔의 나무를 떠나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나무’가 우리에게는 ‘슬픔의 나무’가 아닐런지요. 십자나무 주위를 돌면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부활의 마음으로 사는 은총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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