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영성당입니다.

아이디:
비밀번호:
 AUTO

삶의 자리 > 광영가족 > 삶의 자리
소공동체 탐방
체험사례
삶의자리
미사전례
광영가족 소식
 
 

‘어떻게’ 와 ‘왜’ 18.02.04 21:56




제목 없음



“ ‘어떻게’ 와 ‘왜’”  



    찬미 예수님!
  2016년을 끝으로 학부 과정을 마치고 연구과를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제가 ‘신학생’이라고 불리게 된지 어언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이 시간을 돌이켜 보면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여,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현을 하게 됩니다. 이 삶의 자리를 통해 뒤섞인 이 감정들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처음 신학교에 들어간 날, 2010년 2월 20일. 이 날은 저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곧 삶의 전환점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예비신학교 때에 담임 신학생들의 모습들이 행복해 보여 무작정 들어온 신학교. 그때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성소’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학교에 적응하기에 급급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동안 저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이 신학교를 지내는 것이 잘 지내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라는 단어는 저에게 목표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신학교를 잘 지낼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선배 또는 동기와 잘 지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 등등 여러 가지 방법적인 측면들을 고려하게끔 해 주었고 특히 다른 동료들이 신학교에서 ‘잘 산다’고 칭찬하는 사람의 모습을 따라하게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우선주의는 점점 저를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오직 어떻게 잘 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스스로를 계속 타박하게끔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 안의 연약함을 마주할 때, 그리고 그 연약함으로 넘어질 때마다 자괴감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물어보았습니다. “넌 여기에 합당한 사람이 맞니?” 이러한 번민과 역경 속에서의 신학교 삶은 참으로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라는 질문은 저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질문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뿌리가 얼마나 깊게 내려있는지에 따라 달려 있듯이, 어떤 방법 즉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묻기 전에, 이 일이 나에게 ‘왜’ 좋은지 곧 행동의 원인에 대한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은 후 저의 신학교 삶은 점점 바뀌게 되었습니다. 내가 ‘왜’ 연약함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까? 등의 질문들은 스스로를 알아가게 해 주었으며 자신에 대한 앎이 쌓여감으로서 자신에 대한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져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곧 ‘어떻게’라는 질문이 하나의 이상향을 정해 놓고 그 이상향을 쫓아가는 ‘위로부터의 질문’이었다면  ‘왜’라는 질문은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바라보고 그 원인을 찾아가는 ‘아래로부터의 질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왜’라고 물으면 물을수록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확해 졌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왜’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지 물으면 물을수록 ‘어떻게’ 하느님을 믿어야 되는지 뚜렷한 방향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왜’라는 질문은 끊임없는 물음을 던져줍니다. 하지만 그 물음에 정답을 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정답을 만들어 내는 질문은 결국 ‘어떻게’라는 질문과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지한 질문은 진보도 퇴보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성소는 기계적인 답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고 있는 말씀이기에 저는 오늘도 ‘왜’라는 질문을 통해 하느님을 찾고,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JY